다시금 봐도 가슴 한 켠이 저린다.
동화되어 보기엔 참 멀리온 시간인데도 어렴풋이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어버린다.
다시 보니 이런저런 궁금증이 생겼다. 그 중 치아키 존재에 대한 궁금증... 결코 생산적인 궁금증은 아닐진데;;
미래의 성인인 치아키가 동시대에 살았던 마코토와 같은 또래에 자신의 과거로 온 것인가..
아니면 그저 미래의 한사람이 그림을 보기 위해 과거로 여행이 가능한 타임리프를 이용해
치아키에게 빙의라도 된거란건지...후자가 맞는거 같아....
과연 마코토가 치아키가 미래에서도 볼 수 있도록 이모와 같은 복원가가 되었을지,치아키가 다시금 타임리트를
이용해 마코토를 찾아올수 있는건지 그 후속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지....
시간을 흐를수록 분명한 답을 원하게 되는 것과 귀결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재밌게도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후에 나온 대만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위와 다르게 주인공이 과거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 미: 시간 여행자의 아내 , 일: 시간을 달리는 소녀, 중: 말할 수 없는 비밀 세 영화를 비교하며 보는것도
재밌다. 이미 다 봤지만 언제 관련 포스팅을 좀 해볼까... 정리... 잘 할 수 있을까?
아래글은 내가 갖고 있던 궁금증들이 조금씩 풀어진 다른이의 포스팅.
1.
이 영화에서 주인공 마코토가 궁극적으로 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 선머슴 어린애 같던 고등학생 마코토가 자신의 첫사랑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답변은 영화의 맨 마지막에 마코토가 다시 친구들과 캐치볼 놀이를 하고 있는 시퀀스가 삽입된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치아키가 미래로 돌아가고, 마코토는 친구 코스케에게 털어놓는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정했노라고. 그렇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된 플롯은 시간여행의 소재로 학창시절의 성장통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의제는 "마코토는 어떻게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는가"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영화가 이 의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건 극중 설정을 통해서도 명확히 제시된다. 고등학교 2학년생인 마코토는 문과 이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이를 위해 담임선생은 학생들에게 진로계획서를 쓰게 한다. 그리고 코스케는 마코토에게 꿈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앞으로 너 뭐하고 살 거야?" 이 질문은 성장물의 가장 핵심적인 클리셰 중의 하나이다. <스파이더맨>에서도 졸업을 앞둔 피터와 메리제인이 서로를 보듬으며 물어보던 질문이 아니었던가.
지금까지의 시간은 부모나 학교, 사회 같은 외적 동력에 의해 방향지어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아이들은 곧바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처지가 된다.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일찍부터 가출이나 반항으로 인생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일단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갈망하던 "결정의 순간"에 다다르면 겁에 질린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코스케의 질문에 마코토는 "호텔왕" 따위의 뜬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준 적이 없고, 그들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확실한 자기 직업을 정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프리터 문제가 부각된지 오래이다. 커서도 부모의 돈벌이에 의존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향후 일본 사회에서 심각한 양극화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는 예측도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을 위험이 크다. 한국 학교들만 보아도 진로 상담에 관한 부분은 거의 고려되지 않거나 거의 '폼'으로만 이뤄지고 있으며, 대학 입학만을 위해 학과를 정했다가 후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취업 대란 가운데서도 "적성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신입사원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낯설지 않다.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생산적으로 꾸려나가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회사 조직에서 착취당할 수 없다. 인생은 즐겨야 하는 것이다" 따위의 구호는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상당수 아이들에겐 그 가능성 자체가 거세되어 있다. 마코토처럼 문/이과 선택의 순간이 당신에게 찾아왔을 때, 그 선택의 기준은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기 싫은 것" "할 수 없는 것"이었거나 앞으로 그럴 공산이 크다. 나는 수학은 젬병이니까, 나는 영어엔 관심 없으니까...... 반대로 똑부러지게 의사를 하겠노라고 말하는 코스케도 결국은 가업을 잇겠다는 발상에 불과해 보이고, 그래서 그 선택은 여전히 막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나무랄 수도 없다. 친구 유리와 대화하는 마코토의 말처럼 "미래란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마코토의 시간이동은 그 미래에 대한 미지, 그리고 그 미지가 야기하는 공포를 그대로 반영한다. 어제 먹은 철판구이 다시 먹기, 동생이 슬쩍한 푸딩 먹기, 방금 전에 놓친 캐치볼 잡으러 돌아가기,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서 노래방 무한 루프로 이용하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겠는가? 마코토는 자신이 경험한 시간대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미래는 다가온다는 것 그 자체로 인간에겐 공포이다.
2.
무의식중에 미래에 대한 공포에 부닥친 마코토에게 타임리프는 그 공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켜주는 쾌감을 준다. 그 공포와 쾌감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치아키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영화 전반에서 다른 여자애들에 비하면 남자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야구 놀이를 할 정도로 선머슴에 가까운 성격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코토는 무성(無性)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치아키가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마코토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남성의 상대편으로서, 타인과의 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으로 호명된다. 말 그대로 어린애 같은 무성(無性)이 여성으로 성장할 것을 요구받는 순간, 마코토는 타임리프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이 퇴행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거부, 미래에 대한 거부, 성장에 대한 거부이다. 현재는 시간이 흐름으로써 끊임없이 과거화된다. 하지만 마코토는 타임리프를 통해 현재 속에 어떻게든 머물려고 한다. 성장의 정지는 곧 퇴행과 같다.
이렇듯, 마코토는 "지금 이대로 변함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익한 바람이라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건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 영화 속 경구처럼 시간은 어느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Time waits for no one). 시간에 맞춰 운행해야 하는 열차처럼, 시간은 브레이크가 고장나 "멈출 수 없는" 자전거를 탄 마코토를 비롯한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않고" 어떻게든 "치어버릴" 것이다. 마코토가 아무리 타임리프를 남발해도 결국엔 이모처럼 늙어가지 않을 수 없다. "변하지 않는 것"(영화에 삽입된 오쿠 하나코의 노래 제목)은 없다는 역설.
두 번째 이유. 지금 현재 자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는 불완전하다. 이 때문에 마코토는 현재를 계속 완전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전날처럼 지각도 하지 않고, 쪽지시험도 만점 받고, 요리 시간에 사고도 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결함을 고치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결함을 불러온다. 마코토와 자리를 바꿨다가 화재 사고를 일으킨 아이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엔 유리를 다치게 만든다. 한편으로 코스케와 그를 좋아하는 후배를 이어주려던 마코토의 시도는 두 사람이 열차에 치어 죽게 만드는 사건, 치아키를 미래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순리를 억지로 바꾸려다 벌어지는 비극" 따위의 교훈을 이끌어내는 건 그닥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마코토의 태도에 있다. 타임리프로 현재를 교정할 수 있게 된 마코토는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소신을 어느 정도는 보다 강하게 행동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동엔 결과에 대한 책임감, 타인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 마코토의 타임리프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때 마코토는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는다. 타임리프로 사과할 일 자체를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은 계속 쳇바퀴 돌듯 타인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타인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임을 알게 되는 순간, 이제까지 추구했던 "나의 행복"은 불가능해진다.
이모의 조언, 코스케의 죽음, 치아키와의 이별은 마코토를 각성하게 만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사실, 그러므로 선택과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마코토는 깨닫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론은 단순히 마코토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 그 대신 마코토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타임리프를 현명하게 이용한다. 그 타임리프는 마코토를 현재에 머무르게 만드는 쾌감을 포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타임리프와 다르다. 즉, 치아키와 제대로 이별하고 그를 미래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앞서 치아키와의 헤어짐이 자신의 의지가 빠진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그 헤어짐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이다.
3.
마코토의 타임리프는 처음엔 "푸딩"을 먹기 위해 시작됐다. 그것은 마치 아기가 젖을 달라고 우는 것처럼 자신의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타임리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기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된다. 이로써 미약하게나마, 그러나 자연스럽게, 마코토는 스스로 갈 길을 정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이는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이다. 즉 나 자신의 우물에서 벗어나,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앞서 거론한 젊은이들의 상처를 매만져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래된 정원>에서 현우와 윤희가 버텨야 했던 시대는 "서정시가 쓰여지지 않는 시대"였다면, 마코토와 치아키는 "진로계획서가 쓰여지지 않는 시대"를 뚫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두 시대를 극복할 해답은 공통적으로 사랑, 즉 타인에 대한 애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빈말이 아니다. 첫사랑 치아키를 미래로 보낸 것은 마코토를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도록 만들기 위한 영화의 배려와도 같다. 치아키가 퇴장하기 직전 마코토에게 남기는 "미래에서 기다릴게"라는 대사는 아이돌 팬픽이나 순정만화에서 나올법한 유치한 클리셰로 남지 않는다. 치아키가 미래에 있다는 것, 마코토가 미래로 달려갈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코토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말한다. 마코토는 그것이 비밀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전의 이모가 그러했듯(그녀는 1983년 제작된 실사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인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마코토는 치아키를 위해 그가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그림을 보존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고로, <밀양>의 결론은 여기서 정반대의 언어로 반복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뜨려놓고 그리워해야 한다.
"자기 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데 그때 대처할 수 있는 건 나르시시즘밖에 없다. 우선 자기를 알아야 하니까." <두 번째 사랑> 김진아 감독의 말이다. 이 말은 많은 사람들이 학창시절 겪는 성장통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본질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해답은 자기 안의 공허한 무(無) 안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해답은 오히려 안이 아닌 밖에서 나올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밖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말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 결론은, 진로계획서를 제대로 쓰고 싶다면 학교가 끝나는 대로 친구들을 불러모아 야구를 하라는 것이다. 마코토, 치아키, 코스케의 건강한 관계를 보노라면, 빡빡한 스케줄에 옆에 앉은 짝꿍마저도 내 등수를 위협하는 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한국의 환경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이야기는 절대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by lyh1999.
2007/07/27